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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에서 6월 민주 항쟁까지

해설 · 2026-10-05

7·4 남북 공동 성명을 구실로 선포된 유신 체제가 YH 사건과 부마 항쟁을 거쳐 10·26으로 무너지고, 신군부의 12·12와 5·17, 광주의 항쟁을 지나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를 따라갑니다.

유신 체제

1972년 7월 남과 북은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통일 원칙을 담은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석 달 뒤 박정희는 남북 대화를 뒷받침할 체제 정비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10월 유신). 새 헌법의 골격은 이후락 등이 극비리에 짰다. 유신 헌법은 대통령에게 헌법의 효력마저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 권한을 주었고,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게 되었다.

유신에 대한 반발은 곧 나타났다. 해외에서 반유신 활동을 하던 김대중은 1973년 도쿄에서 납치되었고(김대중 납치 사건), 이 사건은 유신 체제에 대한 비판을 키웠다. 1974년 학생들의 유신 반대 투쟁이 거세지자 정권은 그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다(민청학련 사건).

유신의 끝

1979년 가발 수출업체 YH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의 폐업에 맞서 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YH 사건). 이어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의원직이 박탈되자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부마 민주 항쟁). 정권은 비상계엄과 위수령으로 맞섰지만, 유신 체제의 모순은 이미 한계에 이르러 있었다.

그해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쏘았다(10·26 사건). 직언을 듣지 않는 대통령에 대한 절망이 그 동기였다고 전한다. 유신 체제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신군부의 등장

대통령이 사라진 권력의 공백 속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노태우 등 군 내 사조직 하나회가 1979년 12월 12일 상관인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며 군권을 장악했다(12·12 군사 반란). 이듬해 봄 민주화를 바라는 시위가 이어지자(서울의 봄),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넓히고 국회를 폐쇄했다(5·17 내란).

광주에서는 이에 맞선 시위를 신군부가 공수부대를 보내 폭력으로 진압했고, 시민들은 무장해 맞섰다(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직후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정부의 실권을 쥐었다.

6월 민주 항쟁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숨졌다(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정권이 사건을 숨기고 축소하려 한 사실이 김승훈 신부 등의 폭로로 드러나면서 반정부 투쟁은 더 거세졌다. 4월 13일 전두환이 임기 안의 개헌을 거부하는 호헌 조치를 발표했고,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자 시민의 분노가 폭발했다(6월 민주 항쟁).

광주의 항쟁과 부마 항쟁이 남긴 기억은 이 항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결국 정권은 시민의 요구에 굴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다(6.29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