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에서 5·16 군사정변까지
해설 · 2026-10-05
친일 청산의 좌절에서 3·15 부정선거까지 쌓인 이승만 정부의 모순이 4·19 혁명으로 터지고, 그 뒤 열린 짧은 민주 정부가 군사정변으로 끝나기까지를 따라갑니다.
제1공화국의 출발과 좌절
1948년 제헌헌법 101조는 해방 이전의 악질적 반민족 행위를 처벌할 특별법을 만들 수 있다고 정했고, 그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했다. 그러나 친일 경력의 경찰들이 방해 공작을 벌였고, 위원회는 결국 해산되었다. 반공의 이름 아래 다시 살아난 친일 세력은 집권당의 기반이 되어 국민을 억눌렀고, 뒷날 이것이 4월 혁명의 한 원인으로 꼽힌다.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과 숙군으로 강력한 반공 체제를 세웠다. 전쟁 중의 국민방위군 사건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렸고, 1956년 선거에서 크게 선전한 조봉암은 진보당 사건에 엮여 1959년 사형되었다.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1960년 3월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은 최인규를 내무부장관에 앉히고 공무원을 동원하는 선거 대책 기구를 꾸렸다. 집권 자유당은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려고 노골적인 부정을 저질렀다(3·15부정선거). 이를 규탄하는 마산의 시위가 이어졌고, 4월 19일 거리에 나선 학생과 시민들은 "1인 독재 물러가라", "이승만은 하야하라"를 외쳤다(4·19 혁명).
계엄사령관 송요찬은 군이 시위 진압에 개입하지 않도록 막았다.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했고, 대한민국 제1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장면 정부와 군사정변
혁명 뒤 의원내각제의 장면 정부가 들어섰다. 장면 정부는 이승만 정부의 3개년 계획안을 이어받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기획했지만, 혁명 뒤의 혼란을 다스리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한편 군 내부에는 다른 불만이 쌓여 있었다. 6·25 전쟁을 거치며 크게 불어난 군대는 휴전 뒤 승진이 막혔고, 소장 박정희와 중령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육사 8기생들은 장면 정부가 출범한 지 보름 남짓 만인 1960년 9월 이미 쿠데타를 모의했다. 1961년 5월 16일 이들은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5·16 군사정변).
정변 뒤
정변 직후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뀌었고, 김종필이 이끈 부대가 대한민국 중앙정보부를 만들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이제 박정희 정부의 손에서 본격적으로 집행되었다. 군사 정부가 중단되었던 한일 회담을 다시 열자, 굴욕 외교라는 반대가 1964년 6·3 항쟁으로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