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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원인과 흐름

해설 · 2026-10-05

38선 분할 점령에서 시작된 분단이 어떻게 전쟁으로 터졌고, 중국군의 개입과 1·4 후퇴를 거쳐 정전 협정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전쟁이 남긴 것을 따라갑니다.

분단의 출발점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한반도는 해방을 맞았지만, 군사적 편의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나누어 점령했다. 이것이 분단과 전쟁의 출발점이었다. 통일 정부를 세우려던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고, 한국 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갔다. 1948년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서면서 분단은 공식화되었다(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쟁의 시작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을 설득해 승인을 받은 뒤,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쟁을 일으켰다(6·25 전쟁). 전쟁 초기 국군 제6사단은 춘천과 홍천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닷새 동안 늦추어 진공 계획에 차질을 주었다.

중국군의 개입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이미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참전하겠다고 경고했던 중국이 움직였다. 소련 정치국이 개입을 승인했고, 마오쩌둥은 군대를 의용군 이름으로 보내 한국을 치라고 명령했다. 중국군을 가볍게 본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가 북진을 계속하는 사이, 1950년 11월 말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은 혹한 속에 포위되었다. 포위를 뚫고 물러난 부대는 흥남 철수 작전으로 바다를 건넜다.

1·4 후퇴와 전선의 고착

중국군의 새해 공세에 밀려 미 8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는 서울이 포격권에 들기 전에 주력을 철수하기로 했다(1·4 후퇴). 서울은 다시 적의 손에 넘어갔지만, 이 공세는 오히려 유엔의 결속을 다졌고 지친 중국군은 주도권을 내주었다. 리지웨이는 중국군의 공세가 여드레를 넘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반격을 짰다.

1951년 6월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굳자 양측은 정전을 모색했다. 이승만 정부는 끝까지 반대했지만,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졌다. 휴전의 조건으로 한국은 미국에 군사 동맹을 요구했고, 이는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이어졌다. 협정에 따라 이듬해 정치 문제를 다룰 제네바회담이 열렸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

전쟁이 남긴 것

전쟁은 지리산 일대에서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같은 비극을 낳았고, 일제의 수탈에 이은 전쟁으로 사람들은 극심한 굶주림을 겪었다(보릿고개). 전후 재건은 미국의 원조 물자 위에서 이루어졌고, 그 원조로 밀가루·설탕·면직의 삼백공업이 섰다. 전쟁으로 크게 불어난 군대는 휴전 뒤 승진이 막히며 불만이 쌓였고, 이것은 1961년 5·16 군사정변의 한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