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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에서 갑오개혁까지

해설 · 2026-10-05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자란 개화파가 강화도 조약 이후의 격랑 속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그 실패가 동학 농민 혁명과 청일 전쟁을 거쳐 갑오개혁으로 이어지기까지를 따라갑니다.

개화파가 자란 자리

1870년대 서울 북촌, 관직에서 물러난 박규수의 사랑방에는 젊은 양반 자제들이 드나들었다. 박규수는 할아버지 박지원의 문집을 강의하며 청을 오가던 사신과 역관이 전한 새 사상을 들려주었다. 역관 오경석과 의원 유홍기도 영민한 양반 자제를 골라 개화사상을 가르치자고 뜻을 모았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홍영식이 이렇게 자랐다.

개항과 개화 정책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문호를 열라고 압박했고, 1876년 강화도 조약이 맺어졌다. 조선은 수신사를 일본에 보냈고, 두 번째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은 고종이 개화 정책에 나서는 전기가 되었다. 이듬해 일본의 제도를 살피러 간 신사유람단의 참가자들은 돌아와 새 관청 통리기무아문에 배치되었다. 경상도 유생들이 만 명의 이름으로 『조선책략』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것도 이 무렵이다.

임오군란과 청의 간섭

개화파 관료가 대거 등장하고 군제가 바뀌자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커졌다. 1882년 혁파를 앞둔 군영의 군인들이 신식 군대에 반대하며 들고일어났다(임오군란). 군란을 진압한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넓혔고, 같은 해 맺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명문화했다.

갑신정변

조정은 청에 기대는 쪽과 일본을 본보기로 삼으려는 쪽으로 갈라졌다. 메이지 유신의 성과에 주목한 김옥균과 서광범 등 급진 개화파는 1884년 정변을 일으켰다(갑신정변). 정변은 청군의 개입으로 사흘 만에 실패했고, 이후 청의 내정 간섭은 더 심해졌다. 청과 일본이 이 사건 뒤 맺은 톈진 조약에는 조선에 변란이 생겨 어느 한쪽이 군대를 보내면 상대에게 알린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 이 조항이 십 년 뒤 일본군 파병의 근거가 된다.

동학 농민 혁명과 청일 전쟁

삼정의 문란이 끝내 고쳐지지 않은 채 쌓인 모순은 1894년 터졌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수탈에 맞서 전봉준이 봉기를 맹약했고, 이를 수습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가 오히려 동학교도를 탄압하면서 봉기는 전라도 전체로 번졌다(동학 농민 혁명). 관군으로는 막기 어렵다고 본 홍계훈의 보고로 조정이 청에 구원병을 청하자, 일본도 군대를 보냈다. 청과 일본은 조선 땅에서 맞붙었다(청일 전쟁).

갑오개혁

청일 전쟁이 시작될 무렵 일본군은 궁궐에 들어가 정권을 바꾸었고,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며 개혁이 시작되었다(갑오개혁). 개혁은 멀리 실학에서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으로 이어진 개혁 요구를 배경으로 삼았고, 유길준의 개혁론이 그 이론의 바탕이 되었다. 제2차 개혁은 망명에서 돌아온 박영효가 이끌었다. 조선 법률의 근간이던 『경국대전』은 이 개혁으로 대부분 효력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