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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은 어떻게 넘어갔나 — 1904년에서 1910년까지
해설 · 2026-10-05
러일 전쟁에서 한일 병합 조약까지 여섯 해 동안 외교권·군대·사법권이 차례로 넘어간 과정과, 그에 맞선 계몽 운동과 의병을 함께 따라갑니다.
러일 전쟁과 첫 협약들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대한제국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곧 한일의정서를 강요했다. 그해 8월의 제1차 한일 협약으로 일본이 보낸 고문들이 재정과 외교의 실권을 쥐었고, 재정 고문 메가타의 차관 공세로 나라 빚이 쌓이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 갈 무렵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한반도 문제에서 손을 뗐고, 러시아는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본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했다. 열강의 양해를 얻은 일본은 그해 11월 이토 히로부미를 보내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했다. 이렇게 맺어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잃었고, 이듬해 서울에 통감부가 들어섰다.
헤이그 특사와 군대 해산
고종은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로 이상설·이준·이위종을 몰래 보냈다(헤이그 특사 사건).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을 맺어 각 부처의 차관에 일본인을 앉혔다. 이어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다(대한제국 군대해산).
맞선 사람들
국권이 기울수록 저항도 넓어졌다. 을사조약 직후 「시일야방성대곡」이 실린 황성신문은 정간을 당했고, 실력을 길러 나라를 되찾자는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해졌다. 대구에서 서상돈이 담배를 끊어 나라 빚을 갚자고 제안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으로 번졌고, 안창호 등이 세운 비밀결사 신민회는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세울 계획을 세웠다.
군대 해산 당일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군인들은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해산 군인들이 합류하면서 의병은 전국적인 전쟁으로 커졌다(정미의병). 의병 투쟁이 길어지자 일본은 강점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병합
일본은 1909년 기유각서로 사법권과 감옥 사무까지 가져갔다. 친일 단체 일진회는 병합을 청하는 상소와 성명을 냈고, 송병준은 일본에 건너가 병합을 흥정했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한일병합조약을 맺었고, 8월 29일 순종의 조칙으로 공포되었다. 대한제국은 이로써 사라졌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가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