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graph관계망으로 돌아가기

홈›해설›네 번의 사화와 사림의 길

네 번의 사화와 사림의 길

해설 · 2026-10-05

성종이 등용한 사림이 무오·갑자·기묘·을사의 네 사화를 거치며 어떻게 꺾였다가 다시 일어났고, 그 끝에서 붕당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따라갑니다.

사림의 등장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신들은 대를 이어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성종은 이 훈구 관료들을 견제하려고 영남의 사림을 조정에 불러들였다. 학문과 절의를 내세운 사림은 언론을 맡은 삼사를 거점으로 훈구의 부패를 공격했고, 두 세력의 대립은 점점 깊어졌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첫 충돌은 1498년에 왔다. 사관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세조의 즉위를 빗댄 글이라는 고발을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올렸고, 사초의 내용을 흘린 이극돈이 그 단초를 제공했다. 많은 사림이 죽거나 귀양 갔고, 이미 세상을 떠난 김종직은 무덤이 파헤쳐졌다(무오사화).

여섯 해 뒤의 갑자사화는 왕실의 상처에서 시작되었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성종 때 쫓겨나 사약을 받은 일이 발단이었다.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그 일에 얽힌 이들을 찾아내 벌했고, 성종 때 길러진 사림이 다시 크게 다쳤다.

반정과 기묘사화

연산군의 폭정은 1506년 중종반정으로 끝났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명분을 세우려고 왕도정치를 내걸며 사림을 다시 등용했고, 그 중심에 조광조가 섰다. 그러나 반정 공신의 공훈을 깎아 내자는 위훈삭제까지 밀어붙인 급진 개혁은 국왕과 공신 세력의 반발을 불렀다. 1519년 중종은 위훈삭제 처분 며칠 뒤 사화를 일으켰고, 남곤과 심정 등이 이를 거들었다. 조광조는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기묘사화).

을사사화, 그리고 붕당

다음 사화는 외척 사이의 싸움에서 나왔다. 인종의 외척인 대윤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이 맞섰고(대윤 소윤), 인종이 일찍 죽고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맡은 문정왕후와 그 동생 윤원형이 대윤 세력에게 보복했다(을사사화). 그 여파는 2년 뒤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이어져 남은 이들까지 숙청되었다.

네 번의 시련은 사림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은둔한 사림은 지방에 서원을 세워 학문을 이었고, 그 서원들은 뒷날 정치 논의의 근거지가 되었다. 선조 때 사림이 마침내 조정을 장악하자, 이번에는 그들 사이의 학맥과 정치 노선 차이가 드러났다. 사화를 견뎌 낸 사림이 정국을 쥔 뒤 생겨난 것이 붕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