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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은 무엇을 바꾸었나

해설 · 2026-10-05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고종의 죽음이 겹친 1919년 봄의 만세 운동이, 일제의 통치 방식과 독립운동의 조직과 방향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따라갑니다.

1919년 봄을 만든 것들

국권을 잃은 뒤의 무단 통치는 열 해 가까이 이어졌다. 1918년 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세계 질서가 새로 짜일 것이라는 기대가 독립지사들 사이에 퍼졌다.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은 전후 처리를 논의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려 했고, 그 일원인 장덕수는 일본에서, 선우혁은 국내에서 움직였다.

도쿄의 유학생들이 먼저 나섰다. 상하이의 김규식이 보낸 조소앙의 지도 아래, 1919년 2월 8일 유학생들이 독립을 선언했다(2·8 독립 선언). 이 선언이 국내의 분위기에 불을 당겼다.

같은 해 1월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독살설이 퍼졌고, 국장일이 정해지자 전국에서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천도교의 권동진 등은 손병희와 함께 독립운동을 모의했고,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이 선언되었다(3·1 운동).

바뀐 통치

만세 운동을 무력으로 누르고 보복 학살까지 벌인 일제는 국제 여론의 비판에 부딪혔다. 화성에서는 운동의 주모자를 찾는다며 일본군이 새벽에 마을을 급습해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죽였다(수촌리 학살 사건). 새로 부임한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헌병 경찰을 보통 경찰로 바꾸는 등 유화책을 내세운 문화 통치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경찰의 수는 오히려 늘었고, 감시와 수탈은 더 정교해졌다.

문화 통치 아래에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신문의 발행이 허가되었고(조선일보 등), 한글 연구도 다시 일어나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가 세워졌다. 경제적 실력을 기르자는 운동은 물산장려운동으로, 고등 교육을 우리 손으로 하자는 운동은 민립대학설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바뀐 독립운동

3·1 운동은 독립운동을 이끌 최고 기관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만들었다. 연해주에서는 한족중앙총회가 대한국민의회로 바뀌었고, 4월 상하이에서는 임시헌장과 내각을 갖춘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평화적 시위만으로는 독립을 얻을 수 없다는 판단도 퍼졌다. 해외로 거점을 옮긴 지사들은 더 조직적이고 강한 단체를 만들었다 — 같은 해 결성된 의열단이 그렇다. 북간도의 대종교인들은 무장 투쟁을 위해 북로군정서를 조직했고, 만주 전역에서 무장 항일의 분위기가 퍼지며 이듬해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로 이어졌다.